'조선 무사' 투박하기 그지없는 제목이다. 그리고 자그마한 글씨로 적혀 있던 흥미로운 부제목 조선을 지킨 무인과 무기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 이야기.
평소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터라 명성이 자자한 조선의 전쟁과 전투 그리고 명장의 이름들을 뒤로하고 이름 없던 백성들의 이야기와 무인, 무기 이야기라니 이 책을 읽고 싶은 구미가 확 당겨 참을 수가 없었다.
국사뿐만 아니라 세계 전쟁사를 읽으며,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전쟁사의 아픔을 느껴온 나로서는 조선의 군사력은 아무래도 형편없다는 편견이 가득했다. 그런 편견을 조금이나마 깰 수 있고 새로운 지식을 얻어간다는 설렘은 내가 이 책을 펼 칠 수 있게 한 이유였다.
조선 무사:조선을 지킨 무인과 무기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 이야기의 저자 최형국은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박사이며 전통 무예와 조선의 마상무예를 복원한 지식인이자 무도인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조선의 무인과 전술 무기 체계의 이야기 함으로써 우리 안의 편견을 깨고 진실된 지식을 알려주려고 직접 몸으로 고군분투 중이다.
'결국 우리의 역사 인식이 영웅이나 사건 위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은 전쟁을 통해 기억되는 것이 한 개인이나 혹은 한 가지 사건으로 집중하게 해 그 저변에 깔린 다양한 이야기들이 어디론가 증발하게 해 버린다.'
전쟁에 휩쓸렸던 한 개인의 생각과 뒤에 숨어있던 다양한 이야기들은 무시되고 있다. 종국에는 역사에 등장하는 한 개인에 대한 평가를 무한한 존경과 열망 혹은 비난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으로 이어간다.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배울 점을 찾기 위해서는 역사적 인물과 발생 연도뿐만 아니라 그 안에 일어났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목장을 운영하고 군마를 생산했는데, 이를 담당한 관청이 사복시였다.'
조선의 군 체계는 기병을 중시하는 기병 중심 체제였다. 특히, 군마의 관리가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국가에서 사복 시라는 관청을 만들어 군마를 관리하게 했다. 국가에서 사용하는 말을 사육 관리라기 보단 사용 하게 될 말의 수급, 목장의 신축과 증설 등 전반적인 부분을 관장하는 군사 핵심 기관이었다.
군마 한 마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반 병사 4명에 해당하는 비용이 들었다.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기에 전국으로 일정 수량을 배분해서 키우고 이를 점검하기 위해 해마다 '점마관'을 파견해 군마의 관리 상태와 그 수를 확인토록 했다.
그러나 점마관의 위세는 대단해서 목장에 오는 날은 그 주변 지역이 초토화될 정도였다고 한다.
점마관이 군마의 관리 상태가 소홀하다고 생각되면 곤장 수십대로 끝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직접 말을 관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먹을 양식까지 말에게 먹여 살찌우게 했다. 바쁜 농사철에도 군마를 관리하기 위해 백성들을 차출했으니 아마 그들의 팔자보다 말의 팔자가 더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조선은 기병 편성에 있어서 군마 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 뒤에서 백성의 피땀이 숨겨져 있었다.
'조선시대 군사용어로 두호 라고 하는 첫 번째 나팔 소리가 진영에 울리면 병사들은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무기와 보급품 등을 챙겨 곧바로 밥 지을 준비를 했다.'
세상에, 조선에도 기상나팔이 존재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입대해서 기상나팔 소리에 시달렸었다. 일어나자마자 아침식사를 위해 식사 준비를 했는데 보통 '화병'이라는 취사병과 비슷한 병사가 식사조리를 담당했다.
남은 병사들은 엄숙한 체계를 따라 밥 지을 물을 길어오거나, 땔감을 구해 오도록 했다.
'이후 두 번째 나팔 소리인 이호가 울리면 병사들은 밥을 먹고 무기를 비롯한 장비를 챙겨 막사를 나섰다.
자신이 진형에서 책임진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해야만 했다.'
자, 밥을 먹었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두 번째 나팔이 울리면 조선병사들은 각 주특기에 따라 집결지에 모여 훈련을 시작했다.
조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후에도 근접 전투의 중요성이 요구되는 시기였다. 그 이유로 조선의 병사들은 체력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상시 전투훈련을 할 때도 반드시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거운 무기를 들고 억지로 힘을 쓰게 했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훈련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빠르게 이동하며 진법을 형성해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투 체계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행군 훈련은 인시(寅時, 새벽 3시)에 아침밥을 먹고 묘시(卯時, 새벽 5시)에 출발해, 오시(午時, 낮 12시)에 점심밥을 먹고 미시(未時, 오후 2시)에 마치며, 하루에 30리(약 12킬로미터)를 행군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하루에 12km 행군 훈련도 했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현역 시절에 40km 야간 행군을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별 것 아닌데 라고 오만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조선시대다. 조선의 병사들은 행군 중간에 먹을 초콜릿 바도 없고 이온음료도 없었으며, 지친 심신을 달래줄 컵라면도 먹지 못한다. 몸으로 직접 뛰는 훈련을 하고 난 직후에 행군 훈련을 하였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나의 오만함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들의 12km 30리 행군에는 또 다른 전술적 이유가 있다. 행군 중 적을 만나더라도 병사들이 바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싸울 수 있는 체력적 한계를 고려한 것이다.
병법서에는 30리가 넘는 거리를 하루에 주파하면 병사들의 근력이 쇠약해 지기 때문에 적을 능히 당해내지 못한다라고 적혀 있어 장수들은 행군 거리를 철저히 준수했다.
'조적등이라는 일종의 특수 휴대용 등불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발밑을 비추는 등으로 지금의 랜턴과 비슷한 기능을 한 등불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선 병사도 개인 랜턴을 가지고 있었다. 야간행군 시 병사의 다리에 조적 등을 달아 발밑을 밝히며 행군했다.
야간 행군은 기도 비닉을 유지하는 밀행이라는 행군이 기본이었다. 완전히 어두워지면 '밀밀'이라고 하여 불빛을 감추고 병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전마의 장신구를 떼어냈다. 적군으로 하여금 아군의 위치를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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